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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오는 날의 환상 =서정윤=◈

sala 2005. 12. 14. 18:29

      ◈ 눈오는 날의 환상 =서정윤=◈

      소리를 선두로 그림자들이 떠나고
      이어 어둠과 함께 눈이 내린다.
      그저 다정했던 표정의 들판이
      어둠 속에 서서
      하이얀 소리들로 달리고
      거친 바람의 소용돌이는
      내 흐려진 절망 한쪽 끝을 잡는다.

      아직 포근한 냄새가 나는 눈바람
      무너진 나의 성 아래
      녹슨 칼을 숨겨 둔 돌, 흙 위로
      말 탄 영혼들이 눈발 짙은 안개 사이를
      일어나 내 의식의 성벽을 돌며
      깃발 펄럭이는 외로움을 흔든다.

      부서진 기와 조각을 밟으며 달린다.
      일어나라 일어나
      그 때가 이르렀다. 이제 깨어 있어
      나를 기다려라 하면서 모여드는 눈발
      마을 뒤편에서는
      눈바람에 싸여 나무들만 지치는데
      떠나간 영혼의 남은 자취들만 불가에 모여
      이젠 깨어나지 못할 곤충들을 헤아리고 있다.

      소리와 소리가 창을 들고 싸우고
      그 속에서 엉킨 내 생각들이
      각자 자신의 길을 가 버리면
      나는 차라리 나무가 되어
      그들과 함께 뛰어다닌다.
      말 타고 달리며 깃발을 흔들고
      영원히 아침은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