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b><font color="#B0008F">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b></font>

sala 2007. 1. 28. 18:01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당선소감] 벌컥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해







김윤이



‘진정한 의미의 공적인 분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노나 슬픔을 불특정 다수의 동포와 나누어 가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아름다운 환상에 불과하다. 아픔이란 우선 개인에 머물러 있음으로 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호리에 도시유키 ‘곰의 포석’ 중에서)


올여름, 선풍기 없이 폭염에 시달리면서 이 글을 옮겨 적었다. 선풍기 바람이 싫기도 했지만, 선풍기가 없었기 때문에 악창처럼 달라붙은 더위를 떨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나에 대해 골몰해보기로 했다. 너무나도 평이하게 살 것이다, 라는 내 생각과 달리 살고 있다는 것.


자다가도 벌컥벌컥 가슴이 열리고 우울해지는 내가 너무 신기하다. 그러니 인생은 내게 아름다운 것일까? 끔찍한 것일까? 존경하는 분이 일러주신 것처럼 좀 더 절실해지기를. 그래서 내 시에도 부디 그 깊이가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다.


문학의 깊이와 열정을 몸소 보여주신 서울예대 교수님들,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까지도 재봉일로 생계를 꾸리시는 부모님, 편벽한 나를 이해해주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보인, 05학번 친구들,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준 친구들, 선해주신 심사위원님께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여태도록 나를 놓지 않는 하나님께도.




▲1976년 서울 출생. 본명 김윤희


▲2006 연세대 윤동주 문학상 시부문 수상


2006 계명대 계명문화상 시부문 수상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2년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