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꽃병의 물을 갈며
sala
2007. 9. 30. 17:16
꽃병의 물을 갈며
나희덕
꽃은 어제보다 더욱 붉기만 한데
물에 잠긴 줄기는 썩어가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같은 물에 몸 담그고도
아래에서는 악취가 자라 무성해지고
위로는 붉은 향기가 천연스레 솟아오르고 있으니
이게 웬일인가
꽃을 아름답다 말하는 나는
꽃이 시들까봐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물을 갈아주는 나는
산 것들을 살게 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들을 바로 눈감게 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조간신문 위에는 십오 세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실려 나가고
그 기사에 우리는 잠시 놀란 얼굴이 될 뿐
오히려 그 위에 피어난 꽃을 즐기고 있구나
꽃은 꽃대로 피어나고
줄기는 줄기대로 썩어가고 있을 때
그 죽음이 우연이었다고 지나칠 수 있는가
썩어가는 줄기에서 수은 한줌 훔쳐낸다고
꽃은 순결해질 수 있는가
매일 아침 꽃병의 물을 갈아주며
무엇 하나 깨끗하게 씻어줄 수 없는
우리의 노동을 생각한다
살아 있던 줄기들은 그 밑둥이 잘리우고
꺾인 줄기들은 모두 꽃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방 속에서
출처 : 삼바귀타
출처 : 늦가을 호수
글쓴이 : 김은자 원글보기
메모 :